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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북한정권 창설 60주년
북한정권을 창출한 평양 소련군정 3년
스탈린, 대일전(對日戰) 3년 전부터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 양성
“소련(스탈린)은 어째서 당시 북한주민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박헌영과 같이 굵직한 인사들을 두고 빨치산 운동을 했던 33세의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을까?”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 연구에서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감’을 잡는 정도였을 뿐 시원하게 궁금증을 풀어줄 문헌은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을 소련 국방성 고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냈다.
이 문건은 ‘김일성 부대’로 알려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는 소련군 특수부대 제88정찰여단의 여단장 저우바오중 대좌(우리의 대령)가 1945년 8월 24일에 자신의 직속상관인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보낸 긴급 보고서이다.
저우바오중은 “제88정찰여단은 1942년 6월에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령에 따라 창설됐고, 창설 목적은 조선과 중국을 강점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이들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일본군을 몰아낸 후 조선과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라고 강조한다.
제88정찰여단이 해방 후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 양성소’였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저우바오중은 이어 “스탈린 원수의 지령에 따라 지난 3년간 빨치산 출신 김일성 등 조선인 출신 100여 명을 정치·군사 전문가로 양성했으나 정작 소련의 대일전 때 활용하지 않고 묶어둔 탓에 이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라고 보고한다. 북한 역사의 주장과 달리 김일성·김책·최용건 등 빨치산 출신들이 소련군의 대일전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았음이 문건에 나타난다.
저우바오중의 긴급보고서를 비롯한 관련 문건들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제88정찰여단의 창설 시기와 창설 목적, 구성과 규모, 해체 시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3장).
북한주둔 일본군 고위 장성 27명 포로로 붙잡아 시베리아에 유형
접근하기 어려운 소련 국방성 고문서를 대량으로 발굴해, 1945년 8월 소련군이 평양에 처음 입성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일본군 고위 장성 27명을 포로로 붙잡아 시베리아로 유형시키는 과정이 최초로 생생하게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36년간 서슬이 퍼렇던 일본군 평양수비대는 붉은군대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됐고, 소련군은 ‘식은 죽 먹듯’ 일본군 고위 장성을 포로로 붙잡았음이 드러난다. 특히 지금까지 ‘전쟁의 비밀’로 감춰졌던 소련군과 일본군의 인명 손실, 일본군 포로와 노획무기의 수, 북한지역 내 일본군 배치 상황을 말해주는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전 성적표’는 우리의 현대사 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줄 만하다. 아울러 스탈린이 대일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두 달 전 극동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급파했고, 원산에서 소련군의 남하명령이 취소되었으며, 소련군정 지도부가 평양에 들어가기 전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 예습을 한 사실, 그리고 소련군이 대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이미 북한지역 위수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음을 밝힌 것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다(1~2장).
소련군정 4개월 특별조사보고서, “북조선에 소련의 정치·경제적 진지 구축 안 돼” 지적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은 1945년 12월 25일에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장문의 ‘소련군정 4개월 성적표’ 형식의 특별조사보고서를 보낸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경유해 스탈린에게 보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보고서는 소련군정 4개월 동안 “북조선에서 민주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스탈린 대원수의 1945년 9월 21일자 지령을 실현하기 위한 노선을 대담하게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탈린의 지령은 소련이 점령 초기부터 북한에서만이라도 단독정권을 세워 한반도의 ‘민주기지’로 키워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특별조사보고서는 특히 “북조선의 부르주아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조선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소련의 국가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고한 정치적·경제적 진지를 북조선에서 구축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북조선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중이 드러나는 지점이다(4장).
박헌영, 1946년 봄 미국 기자에게 “조선 임시정부 대통령에 김일성” 밝혀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은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미국의 UP통신(현 UPI통신의 전신)의 호이트 기자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씨는 전시에 빨치산 지도자였던 민족영웅이다. 그는 북조선인민들이 지지할뿐더러 남조선 인민도 민족영웅으로 여긴다. 북조선의 여러 당에서 그를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 대통령으로 내세우면 남조선 인민과 우리 당에서도 지지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이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출발부터 영원한 정적관계’였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뒤엎는 충격적인 선언이다(7장).
또 박헌영은 1946년 1월 5일에 서울의 내외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존스턴 기자에게 ‘소비에트 조선’을 언급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희귀문헌인 박헌영의 [조선인민에게 드림]이라는 연설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5장).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춰졌던 제2차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 속기록 발굴
지금까지 베일 속에 감춰졌던 제2차 남북지도자 연석회의 전모가 담긴 장문의 속기록이 공개됐다.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 스티코프 대장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것이다. 비록 ‘고무도장’에 불과했지만 제1차 남북협상에 참석한 인사 70여 명이 잔류한 가운데 열린 이 연석회의에서 당시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던 좌익계의 지하선거, 해주인민대회와 같은 각종 대남 전략이 결정됐음이 문건으로는 최초로 밝혀졌다. 1948년 4월 제1차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이어 이 회의도 소련군정이 기획·연출을 맡았던 셈이다(11장).
미군정 대표, 1946년 가을에 감금 중인 조만식 면회
평양주둔 소련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정보기관 소속)는 1946년 10월 5일에 미소공위 미국 측 대표의 한 사람인 번스가 평양을 방문해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을 오랫동안 만났음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한다. 이 보고서는 소련군정이 조만식 선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소련군정이 조만식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했음을 문건을 통해 확인해주고 있다(5장).
소련 국방성, “여운형은 누구?” 지령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는 1945년 10월 5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에 대해 보고하라”는 소련 국방성의 지령을 받고 여운형에 대한 평정서 형식의 보고서를 극동군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등을 경유해 국방성 차관 불가닌 대장과 소련군 총참모장 안토노프 대장에게 보낸다. 소련군정 초기에 소련이 여운형에게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문건이다(4장).
소련군정의 ‘북조선 민주개혁 프로그램’ 모스크바에서 준비
각종 문건을 통해 소련이 1946년 3월부터 실시한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등 이른바 ‘민주개혁 프로그램’도 모스크바에서 준비하고 들어왔음이 밝혀졌다. 또한 당시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초기 북한주둔 소련군인이 귀중품을 강탈하거나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등 횡포를 저질렀음이 생생하게 드러났다(7~8장).
제1·2차 미소공위 소련 측 비밀지령
소련이 제1·2차 미소공위 때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해 임시정부 내각 명단까지 준비하는 등 소련 측 대표단에 보낸 각종 비밀지령들이 문건으로는 최초로 드러났다. 신탁통치 정국에서 한반도에 대해 소련이 품었던 의도가 숨어 있다(6장).
결론적으로 소련은 1942년 6월부터 제88정찰여단에서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를 양성해두었으며 북한을 점령해 대일전을 끝낸 지 한 달 후인 1945년 9월 21일에 단독으로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신탁통치,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위 개혁, 남북협상 등을 통해 동유럽에서와 같이 한반도에도 자신들의 위성국인 ‘소비에트화 민주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전략적 접근을 시도했음이 당시의 문건 등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북한정권 창설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민족에게 분단 60년사는 인고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다.
해방 후 남한의 미군정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는 그동안 활발히 진행돼왔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한반도의 반쪽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정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을 담은 자료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련이 붕괴된 후에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 볼셰비키당 권력의 엔진인 크렘린궁과 국방성, 정보기관, 소련공산당 등의 핵심문헌들은 극비문서로 분류돼 고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필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의 고문서 보관소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북한정권 창출 과정을 다룬 희귀문건들을 찾아냈다. 게다가 당시 소련군정과 정보기관 고위 간부들, 그리고 초기 북한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에게서 증언을 들었고, 희귀문헌 및 사진 등의 자료를 발굴해냈다. 이를 통해 60여 년 동안 감춰졌거나 왜곡됐던 북한정권 창출 목적과 배경, 그리고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재조명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소련의 평양군정]은 이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독자 대상
-국내·국제정치, 북한정치, 한국 현대사 관련 연구자 및 학부생
-해방 전후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
북한정권을 창출한 평양 소련군정 3년
스탈린, 대일전(對日戰) 3년 전부터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 양성
“소련(스탈린)은 어째서 당시 북한주민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박헌영과 같이 굵직한 인사들을 두고 빨치산 운동을 했던 33세의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을까?”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 연구에서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감’을 잡는 정도였을 뿐 시원하게 궁금증을 풀어줄 문헌은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을 소련 국방성 고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냈다.
이 문건은 ‘김일성 부대’로 알려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는 소련군 특수부대 제88정찰여단의 여단장 저우바오중 대좌(우리의 대령)가 1945년 8월 24일에 자신의 직속상관인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보낸 긴급 보고서이다.
저우바오중은 “제88정찰여단은 1942년 6월에 스탈린 동지의 직접 지령에 따라 창설됐고, 창설 목적은 조선과 중국을 강점하고 있는 일본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이들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일본군을 몰아낸 후 조선과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라고 강조한다.
제88정찰여단이 해방 후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 양성소’였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저우바오중은 이어 “스탈린 원수의 지령에 따라 지난 3년간 빨치산 출신 김일성 등 조선인 출신 100여 명을 정치·군사 전문가로 양성했으나 정작 소련의 대일전 때 활용하지 않고 묶어둔 탓에 이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라고 보고한다. 북한 역사의 주장과 달리 김일성·김책·최용건 등 빨치산 출신들이 소련군의 대일전에서 총 한 방 쏘지 않았음이 문건에 나타난다.
저우바오중의 긴급보고서를 비롯한 관련 문건들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제88정찰여단의 창설 시기와 창설 목적, 구성과 규모, 해체 시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3장).
북한주둔 일본군 고위 장성 27명 포로로 붙잡아 시베리아에 유형
접근하기 어려운 소련 국방성 고문서를 대량으로 발굴해, 1945년 8월 소련군이 평양에 처음 입성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일본군 고위 장성 27명을 포로로 붙잡아 시베리아로 유형시키는 과정이 최초로 생생하게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36년간 서슬이 퍼렇던 일본군 평양수비대는 붉은군대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됐고, 소련군은 ‘식은 죽 먹듯’ 일본군 고위 장성을 포로로 붙잡았음이 드러난다. 특히 지금까지 ‘전쟁의 비밀’로 감춰졌던 소련군과 일본군의 인명 손실, 일본군 포로와 노획무기의 수, 북한지역 내 일본군 배치 상황을 말해주는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전 성적표’는 우리의 현대사 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줄 만하다. 아울러 스탈린이 대일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두 달 전 극동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급파했고, 원산에서 소련군의 남하명령이 취소되었으며, 소련군정 지도부가 평양에 들어가기 전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 예습을 한 사실, 그리고 소련군이 대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이미 북한지역 위수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음을 밝힌 것은 우리 현대사 연구에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다(1~2장).
소련군정 4개월 특별조사보고서, “북조선에 소련의 정치·경제적 진지 구축 안 돼” 지적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은 1945년 12월 25일에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장문의 ‘소련군정 4개월 성적표’ 형식의 특별조사보고서를 보낸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경유해 스탈린에게 보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보고서는 소련군정 4개월 동안 “북조선에서 민주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스탈린 대원수의 1945년 9월 21일자 지령을 실현하기 위한 노선을 대담하게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탈린의 지령은 소련이 점령 초기부터 북한에서만이라도 단독정권을 세워 한반도의 ‘민주기지’로 키워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특별조사보고서는 특히 “북조선의 부르주아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조선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소련의 국가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고한 정치적·경제적 진지를 북조선에서 구축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북조선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중이 드러나는 지점이다(4장).
박헌영, 1946년 봄 미국 기자에게 “조선 임시정부 대통령에 김일성” 밝혀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은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미국의 UP통신(현 UPI통신의 전신)의 호이트 기자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씨는 전시에 빨치산 지도자였던 민족영웅이다. 그는 북조선인민들이 지지할뿐더러 남조선 인민도 민족영웅으로 여긴다. 북조선의 여러 당에서 그를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 대통령으로 내세우면 남조선 인민과 우리 당에서도 지지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이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출발부터 영원한 정적관계’였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뒤엎는 충격적인 선언이다(7장).
또 박헌영은 1946년 1월 5일에 서울의 내외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존스턴 기자에게 ‘소비에트 조선’을 언급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희귀문헌인 박헌영의 [조선인민에게 드림]이라는 연설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5장).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춰졌던 제2차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 속기록 발굴
지금까지 베일 속에 감춰졌던 제2차 남북지도자 연석회의 전모가 담긴 장문의 속기록이 공개됐다.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 스티코프 대장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것이다. 비록 ‘고무도장’에 불과했지만 제1차 남북협상에 참석한 인사 70여 명이 잔류한 가운데 열린 이 연석회의에서 당시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던 좌익계의 지하선거, 해주인민대회와 같은 각종 대남 전략이 결정됐음이 문건으로는 최초로 밝혀졌다. 1948년 4월 제1차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이어 이 회의도 소련군정이 기획·연출을 맡았던 셈이다(11장).
미군정 대표, 1946년 가을에 감금 중인 조만식 면회
평양주둔 소련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정보기관 소속)는 1946년 10월 5일에 미소공위 미국 측 대표의 한 사람인 번스가 평양을 방문해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을 오랫동안 만났음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한다. 이 보고서는 소련군정이 조만식 선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소련군정이 조만식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했음을 문건을 통해 확인해주고 있다(5장).
소련 국방성, “여운형은 누구?” 지령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는 1945년 10월 5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에 대해 보고하라”는 소련 국방성의 지령을 받고 여운형에 대한 평정서 형식의 보고서를 극동군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등을 경유해 국방성 차관 불가닌 대장과 소련군 총참모장 안토노프 대장에게 보낸다. 소련군정 초기에 소련이 여운형에게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문건이다(4장).
소련군정의 ‘북조선 민주개혁 프로그램’ 모스크바에서 준비
각종 문건을 통해 소련이 1946년 3월부터 실시한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등 이른바 ‘민주개혁 프로그램’도 모스크바에서 준비하고 들어왔음이 밝혀졌다. 또한 당시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초기 북한주둔 소련군인이 귀중품을 강탈하거나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등 횡포를 저질렀음이 생생하게 드러났다(7~8장).
제1·2차 미소공위 소련 측 비밀지령
소련이 제1·2차 미소공위 때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해 임시정부 내각 명단까지 준비하는 등 소련 측 대표단에 보낸 각종 비밀지령들이 문건으로는 최초로 드러났다. 신탁통치 정국에서 한반도에 대해 소련이 품었던 의도가 숨어 있다(6장).
결론적으로 소련은 1942년 6월부터 제88정찰여단에서 조선의 정치·군사 지도자를 양성해두었으며 북한을 점령해 대일전을 끝낸 지 한 달 후인 1945년 9월 21일에 단독으로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신탁통치,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위 개혁, 남북협상 등을 통해 동유럽에서와 같이 한반도에도 자신들의 위성국인 ‘소비에트화 민주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전략적 접근을 시도했음이 당시의 문건 등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북한정권 창설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민족에게 분단 60년사는 인고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다.
해방 후 남한의 미군정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는 그동안 활발히 진행돼왔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한반도의 반쪽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정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을 담은 자료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련이 붕괴된 후에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 볼셰비키당 권력의 엔진인 크렘린궁과 국방성, 정보기관, 소련공산당 등의 핵심문헌들은 극비문서로 분류돼 고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필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의 고문서 보관소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북한정권 창출 과정을 다룬 희귀문건들을 찾아냈다. 게다가 당시 소련군정과 정보기관 고위 간부들, 그리고 초기 북한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사에게서 증언을 들었고, 희귀문헌 및 사진 등의 자료를 발굴해냈다. 이를 통해 60여 년 동안 감춰졌거나 왜곡됐던 북한정권 창출 목적과 배경, 그리고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재조명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소련의 평양군정]은 이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독자 대상
-국내·국제정치, 북한정치, 한국 현대사 관련 연구자 및 학부생
-해방 전후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
목차
화보집(32쪽)
추천사(중앙일보 대기자 김영희)
책머리에
제1장 소련군, 일본군 저항 없이 평양 입성
제2장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비화(秘話)
제3장 제88정찰여단, ‘조선인 출신 정치·군사 지도자 양성소’
제4장 긴박했던 소련군정 초기 4개월
제5장 신탁통치정국
제6장 미소공동위원회의 숨겨진 진실
제7장 북한 최고지도부에 대한 소련의 복심
제8장 북한의 정당·헌법·정권 창출을 주도한 소련군정
제9장 소련군정이 기획·연출한 남북 연석회의
제10장 소련군정이 주도한 초기 북한정권 내각 구성
제11장 60년 만에 벗겨진 제2차 남북 연석회의의 비밀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