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행본
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 서명/저자사항
- 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 에리카 밀러 지음 ; 이민경 옮김
- 개인저자
- Millar, Erica | 이민경
- 발행사항
- 파주 : arte, 2019
- 형태사항
- 350 p. ; 22 cm
- ISBN
- 9788950981259
- 주기사항
- 영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 참고문헌(p. 315-341)과 색인(p. 343-350) 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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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EM050741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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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EM050741
- 상태/반납예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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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실
책 소개
임신중지는 범죄도,
‘도덕’, ‘모성’,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남은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과의 전쟁이다!
“임신중지는 ‘선택’과 무관한,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한 주제다. 페미니즘과 인권 담론의 교과서를 원한다면, 이 책이 가장 적절하다.”
_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감정은 ‘자연’이 아니라 ‘정치’이며 그 ‘감정정치’의 한가운데에 임신중지가 있다.”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저자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그저 더 많은 이야기의 물꼬를 연 것이다.”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낙태죄 위헌소원 대리인단
‘차악’, ‘필요악’이라는 임신중지에 관한 ‘상식’은
국가, 민족, 계급, 인종, 장애, 젠더를 둘러싼 ‘정치 역학의 산물’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촉발된 임신중지 논의의 출발점은 ‘감정’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로 이어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회가 여성을 결정과 선택의 주체로 공인한 사례이다. 하지만 『임신중지』의 저자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에 ‘선택’이라는 수사가 따라붙고 여성이 ‘주체’의 자리에 앉은 듯 보일 때부터 ‘백래시’는 더 교묘하고 견고해진다고 말한다. 임신중지 관련법이 바뀌더라도 임신중지와 관련된 상식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유해하고 끔찍하며 도덕성을 의심받을 일이라고 믿는다. ‘임신중지’가 입에 오르는 어디서나, ‘절박한,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한, 후회되는, 소름 끼치는’ 같은 수사가 따라붙는다. ‘범죄’라는 누명을 벗고 ‘살인’과 나란히 놓이던 처지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라는 ‘선택’을 늘 ‘차악’이나 ‘필요악’으로만 받아들인다. 임신중지는 처벌할 대상이 아니라고, 임신중지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경험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임신중지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운동사를 연구하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임신중지에 관한 생각과 이미지가 친임신중지와 반임신중지 운동의 부침 속에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임을 발견한다. 『임신중지』에서 에리카 밀러는 1960년대 촉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임신중지 운동사를 탐색하며 ‘사회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을 ‘모성적 행복’, ‘애통함’, ‘수치’, ‘공포’라는 특정한 감정으로 점철시키는 획일적인 임신중지 서사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계급, 인종, 장애에 대한 차별, 젠더권력과 성차별적 정치 역학을 파헤친다.
『임신중지』는 총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활발했던 임신중지 운동의 역사를 밝히며, 이 과정에서 ‘선택’이라는 수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한다. 2장에서는 소위 ‘진보적’인 임신중지 관련법 제정과 개정의 과정에서 ‘모성’이라는 거대한 각본이 작동한 정치 공학을 들여다본다. 3장에서는 1980년대 중반 반임신중지 운동에서 펼친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표현된 ‘태아’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규범적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살펴본다. 4장과 5장에서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여기도록 만든 과정을 밝히고, 인종, 계급, 젠더에 따라 국가와 사회가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임신을 계급화해 온 정치의 전모를 밝힌다.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 속에서 평면적으로만 이해됐던 임신중지는 사실상 가족, 섹슈얼리티, 여성의 지위 등 여러 사회, 정치적 의미와 공명해 온 입체적인 문제다. 이 책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감정의 정치를 해체하고, 이를 통해 임신중지라는 사안을 제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금기’로서의 임신중지가 만든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여성 통제
사회에 대한 위협, 부주의한 실패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
임신중지 여성을 둘러싼 주홍글씨들
임신중지라는 화제는 오랜 금기였다. 월경과 여성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금기시되어 왔다. 이런 금기로 인해 여성은 임신중지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침묵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침묵’이 임신중지에 대한 공적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당사자의 ‘침묵’을 대신해 기존에 널리 유통되었던 임신중지를 둘러싼 이야기 전부는 당사자와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도리어 임신중지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정의대로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경험하기를 강요받았다. 임신중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이 각본에서 여성의 삶은 ‘혼전 순결’에서 출발해 결혼한 후에는 모성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표현되며, 이 ‘정상적’ 각본이 강화될수록 혼전 성관계를 한 여성, 아이 낳기를 원치 않는 여성은 수치와 죄책감을 떠안게 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피임은 “여성이 스스로를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수사 속에서 여성의 책무이자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제약에 가세하게 됐다. 이런 수사는 출산과 양육, 모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여성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에서 남성을 지우고, 쾌락은 오로지 남성의 특권이라는 틀을 강화했다. 피임이란 책임이 여성에게 지워지면서 세계적으로 약 40퍼센트의 임신이 ‘계획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현실은 가려진 채 ‘선택해서 한 임신’이라는 이상ideal이 만들어졌다. 모든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기대는 임신중지에 따르는 수치심의 주요한 근원이 되었다. 원치 않은 임신과 그로 인한 임신중지는 곧 피임에 실패한 패배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에 가해지는 징벌로 표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사회불안의 근원들과 연결되며 ‘국가적 위기’마다 사회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호명됐다. 특히 임신중지에 접근성을 높일 법적인 토대가 마련된 이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임신중지 비율이 출생률-생산력-인종구성과 관련된 주요한 위협으로 쟁점화됐다. 정치인들은 임신중지로 일어나는 인구손실 때문에 잠재적 소비자가 줄어들면서 고용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그 결과 부양할 사람이 없는 노인들만 양산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심지어는 “임신중지로 기혼 여성이 직장에 남을 수 있게 되어, 젊은 여성은 고용기회를 위협받는다”고까지 주장한다.
중산층 이상 다수인종에 속하는 여성이 행하는 임신중지는 ‘국가적 비극’이 되고, 이 임신중지 여성이 사회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과정에서 어떤 임신은 출산으로 이어지든 임신중지로 이어지든, 무책임하고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국가가 정의하는 ‘시민’의 모습이 드러나고 거기서 배제하려는 존재들이 드러난다. “임신중지 여성은 ‘페미니스트’라는 상과 연결될 때 아이, 남성, 가족에 반하는 존재로, ‘십 대 엄마’, ‘복지 의존자’, ‘성적으로 무책임한 자’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 ‘부주의한 실패자’로, ‘이혼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 양육자’, ‘싱글맘’과 연결될 때는 핵가족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호명된다.”
“여성의 선택권, 자기결정권”
“이기적 선택으로 자행되는 살인”
“피치 못할 선택이자 필요악”
‘선택’의 함정에 빠진 임신중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급부상한 임신중지 운동은 임신중지와 관련한 법과 담론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등장한 세 관련 단체 RTL(Right to Life, 생명인권그룹), ALRA(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 임신중지법개혁연합), WLM(Women’s Liberation Movement, 여성해방운동)은 저마다 임신중지라는 결정에서 ‘선택’이라는 수사를 활용했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모든 법률 폐기를 주장한 WLM은 임신중지권이 여성의 ‘선택권’이자 신체에 대한 ‘통제권’, 나아가 ‘자기결정권’임을 주장했다. RTL은 사람으로 형상화된 태아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며 임신중지가 여성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자행되는 ‘살인’이라 주장했다. ALRA는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동의하는 동시에 ‘선택’이라는 글자 앞에 ‘피치 못할’이라는 조건을 달아 임신중지를 ‘필요악’으로 보는 오늘날 보편적인 견해를 형성했다.
이렇게 임신중지 서사에 도입된 ‘선택’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임신중지 서사를 왜곡하고, 임신중지 여성을 괴롭혀 왔다. 200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임신중지와 관련된 여성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관련 법안 지지자들조차 여성이 모든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극단적’인 접근이라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율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임신중지 비범죄화와 의료화에 찬성하는 입법자들 역시 임신중지 결정에서 의사의 조언은 중요하고, 임신중지가 쉬운 일이어서도 안 되며, 당연히 자기 편의만을 위해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여성은 없고, 아주 난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여성은 반드시 모성을 ‘선택’ 하리라는, 임신중지 반대자들과 정확히 같은 주장을 한다. 결국 ‘선택’이라는 수사는 임신중지라는 결정마저 태어날 아이의 복리를 위한 ‘모성적’ 행위로 못 박았다. 이는 70년대 만들어져 확고하게 유지되어 온 임신중지에 대한 인식이 지금까지도 얼마나 강력한 규범으로 작동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친임신중지권 진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준다.
반임신중지 세력 역시 “여성의 선택을 금하기는커녕 그 선택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편다. 2007년 설립된 반임신중지 단체 ‘진정한 선택Real Choices’은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단체를 자청한다. 이들은 그간 여성들이 내린 임신중지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 적절한 정보가 없었기에 사회로부터 ‘강요’받아 내린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입법자와 행정가 들이 이런 논리에 매혹되는 것은 당연했다. 재생산권에 대한 통제라는 결실을 얻으면서도 임신중지 범죄화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이 아니라 여성을 ‘돕는다’는 이미지로 비춰지는 데는 이 같은 ‘모성적’ ‘프로초이스’의 논리만한 것이 없었다.
반임신중지 세력이 펴는 ‘친여성’ 정치는 벌써부터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7월, 미국 35개 주에서 임신중지 전 상담이 의무화됐다. 상담자는 임신중지 위험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필수적인 정보처럼 전달하고, 초음파 영상을 보며 배아/태아를 ‘잠재적 아이’로서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후회할 선택’을 내리기 쉬운, 국가, 의사 등에 의지해야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취약한 존재가 되고, 결국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낙인은 여성 전체의 인권을 훼손하고 탄압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와 임신중지권 보장을 주장하는 정치인과 입법자 들 역시 ‘합법적이고, 안전하고, 드문’ 임신중지를 목표로 삼아 왔다. 하지만 임신유지만을 정규화하는 반복적인 정치 논리는 임신중지를 ‘올바르게’ 결정할 권한을 위임받고, 실제 임신중지 시술을 맡는 의료인들에게도 낙인을 찍는다. 지향점이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드문’ 임신중지가 될 때, 의료인의 제일 과제는 임신중지를 ‘드물게’ 만드는 것, 임신중지를 막는 것이 된다. 실상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국가에서도 이런 낙인은 여성 건강 전문 의료인들의 수가 늘 부족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낙인은 연구자에게도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임신중지 트라우마만을 연구 주제로 삼도록 무언의 강요로 작용했다. 동시에 원치 않은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질 경우 생기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낙인과 좌절이 불러 온 여파는 다시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극우세력의 반임신중지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된다.
“임신중지는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한 문제”
입법을 위한 입체적이고 실질적인 임신중지 논의는
금기와 침묵을 깨고,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위한 첫걸음인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끌어 내기까지 많은 논의와 노력이 있었고, 특히 임신중지 여성들이 화자가 되어 임신중지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 있던, 드디어 말해진 임신중지 경험들은 임신중지가 여전히 범죄인 상황에서 임신중지라는 결정을 내린 여성이 제도적, 문화적으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것들이 다수였다.
한국에서 여성인권과 재생산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앨라배마주 상원에서 모든 임신중지를 중죄로 처벌하는 임신중지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1973년에 있었던 임신 후 28주(6개월)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 위한 보수 세력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트위터에서는 많은 여성이 #ShoutYourAbortion와 #YouKnowMe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했다. 배우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비지 필립스를 시작으로 레이디 가가, 밀라 요보비치 같은 유명인들을 포함해 여성 수천 명이 공유한 임신중지 경험 중 많은 수는 ‘구원받은 듯한’, ‘감사한’, ‘후회 없는’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이 역사적 교차점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하며, 어떤 청사진을 그릴 수 있을까.
에리카 밀러가 『임신중지』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확실하다.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근원은 실상 법이 아니다. “법은 젠더, 임신, 모성 규범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며 “규범은 법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이미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이룬 국가들에서 보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임신중지 범죄화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규범을 바꾸어 내지 못한다면 언제든 우리가 일군 결과는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판결 이전으로의 퇴보를 미연에 방지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임신중지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치’, ‘애통함’, ‘모성’으로 얼룩진 임신중지 규범을 바꾸는 일임을 일깨운다.
이 책의 원제에는 임신중지를 뜻하는 ‘abortion’ 앞에 ‘행복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우리는 과연 ‘행복한’ ‘임신중지’를 말할 수 있게 될까. 지난해 5월 한 해 먼저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이룬 아일랜드 수정헌법8조폐지연합 비서관 시네이드 케네디는 ‘행복한’ 임신중지가 급진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로지 임신중지의 권리가 공격받는 곳에서만 그 수식에서 과도한 급진성과 불편함을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이 ‘끔찍한’을 ‘행복한’으로 대체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모든 경험과 결정들이 그렇듯 임신중지 역시 기쁨 혹은 슬픔이나 정상이나 비정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임신중지』는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복원함으로써 사회와 법이 그 다양성을 포괄하도록 촉구한다.
한국에 이 책이 소개되는 지금, ‘낙태죄’라는 ‘죄목’을 법문에서 지워 내고, ‘임신중지’라는 말로 이 경험을 표현하는 데까지 우리는 와 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임신중지 앞에 여전히 따라 붙는 ‘수치스러운’, ‘후회되는’, ‘끔찍한’이라는 수사를 지워 내는 것이다. ‘행복한’을 비롯해 ‘구원받은 듯한’, ‘감사한’, ‘후회 없는’으로 말해지는 임신중지 경험을 주저하지 않고 나눌 토대를 만드는 데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실질적이고, 입체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도덕’, ‘모성’,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남은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과의 전쟁이다!
“임신중지는 ‘선택’과 무관한,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한 주제다. 페미니즘과 인권 담론의 교과서를 원한다면, 이 책이 가장 적절하다.”
_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감정은 ‘자연’이 아니라 ‘정치’이며 그 ‘감정정치’의 한가운데에 임신중지가 있다.”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저자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그저 더 많은 이야기의 물꼬를 연 것이다.”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낙태죄 위헌소원 대리인단
‘차악’, ‘필요악’이라는 임신중지에 관한 ‘상식’은
국가, 민족, 계급, 인종, 장애, 젠더를 둘러싼 ‘정치 역학의 산물’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촉발된 임신중지 논의의 출발점은 ‘감정’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로 이어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사회가 여성을 결정과 선택의 주체로 공인한 사례이다. 하지만 『임신중지』의 저자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에 ‘선택’이라는 수사가 따라붙고 여성이 ‘주체’의 자리에 앉은 듯 보일 때부터 ‘백래시’는 더 교묘하고 견고해진다고 말한다. 임신중지 관련법이 바뀌더라도 임신중지와 관련된 상식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가 여성에게 유해하고 끔찍하며 도덕성을 의심받을 일이라고 믿는다. ‘임신중지’가 입에 오르는 어디서나, ‘절박한, 끔찍한, 비극적인, 불행한, 후회되는, 소름 끼치는’ 같은 수사가 따라붙는다. ‘범죄’라는 누명을 벗고 ‘살인’과 나란히 놓이던 처지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임신중지라는 ‘선택’을 늘 ‘차악’이나 ‘필요악’으로만 받아들인다. 임신중지는 처벌할 대상이 아니라고, 임신중지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경험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해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임신중지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운동사를 연구하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임신중지에 관한 생각과 이미지가 친임신중지와 반임신중지 운동의 부침 속에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임을 발견한다. 『임신중지』에서 에리카 밀러는 1960년대 촉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임신중지 운동사를 탐색하며 ‘사회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을 ‘모성적 행복’, ‘애통함’, ‘수치’, ‘공포’라는 특정한 감정으로 점철시키는 획일적인 임신중지 서사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계급, 인종, 장애에 대한 차별, 젠더권력과 성차별적 정치 역학을 파헤친다.
『임신중지』는 총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활발했던 임신중지 운동의 역사를 밝히며, 이 과정에서 ‘선택’이라는 수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한다. 2장에서는 소위 ‘진보적’인 임신중지 관련법 제정과 개정의 과정에서 ‘모성’이라는 거대한 각본이 작동한 정치 공학을 들여다본다. 3장에서는 1980년대 중반 반임신중지 운동에서 펼친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표현된 ‘태아’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규범적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살펴본다. 4장과 5장에서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여기도록 만든 과정을 밝히고, 인종, 계급, 젠더에 따라 국가와 사회가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임신을 계급화해 온 정치의 전모를 밝힌다.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 속에서 평면적으로만 이해됐던 임신중지는 사실상 가족, 섹슈얼리티, 여성의 지위 등 여러 사회, 정치적 의미와 공명해 온 입체적인 문제다. 이 책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감정의 정치를 해체하고, 이를 통해 임신중지라는 사안을 제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금기’로서의 임신중지가 만든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여성 통제
사회에 대한 위협, 부주의한 실패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
임신중지 여성을 둘러싼 주홍글씨들
임신중지라는 화제는 오랜 금기였다. 월경과 여성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금기시되어 왔다. 이런 금기로 인해 여성은 임신중지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침묵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침묵’이 임신중지에 대한 공적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당사자의 ‘침묵’을 대신해 기존에 널리 유통되었던 임신중지를 둘러싼 이야기 전부는 당사자와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도리어 임신중지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정의대로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경험하기를 강요받았다. 임신중지 여성의 목소리가 없는 이 각본에서 여성의 삶은 ‘혼전 순결’에서 출발해 결혼한 후에는 모성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표현되며, 이 ‘정상적’ 각본이 강화될수록 혼전 성관계를 한 여성, 아이 낳기를 원치 않는 여성은 수치와 죄책감을 떠안게 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피임은 “여성이 스스로를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수사 속에서 여성의 책무이자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제약에 가세하게 됐다. 이런 수사는 출산과 양육, 모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여성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에서 남성을 지우고, 쾌락은 오로지 남성의 특권이라는 틀을 강화했다. 피임이란 책임이 여성에게 지워지면서 세계적으로 약 40퍼센트의 임신이 ‘계획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현실은 가려진 채 ‘선택해서 한 임신’이라는 이상ideal이 만들어졌다. 모든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기대는 임신중지에 따르는 수치심의 주요한 근원이 되었다. 원치 않은 임신과 그로 인한 임신중지는 곧 피임에 실패한 패배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에 가해지는 징벌로 표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임신중지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사회불안의 근원들과 연결되며 ‘국가적 위기’마다 사회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호명됐다. 특히 임신중지에 접근성을 높일 법적인 토대가 마련된 이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임신중지 비율이 출생률-생산력-인종구성과 관련된 주요한 위협으로 쟁점화됐다. 정치인들은 임신중지로 일어나는 인구손실 때문에 잠재적 소비자가 줄어들면서 고용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그 결과 부양할 사람이 없는 노인들만 양산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심지어는 “임신중지로 기혼 여성이 직장에 남을 수 있게 되어, 젊은 여성은 고용기회를 위협받는다”고까지 주장한다.
중산층 이상 다수인종에 속하는 여성이 행하는 임신중지는 ‘국가적 비극’이 되고, 이 임신중지 여성이 사회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과정에서 어떤 임신은 출산으로 이어지든 임신중지로 이어지든, 무책임하고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국가가 정의하는 ‘시민’의 모습이 드러나고 거기서 배제하려는 존재들이 드러난다. “임신중지 여성은 ‘페미니스트’라는 상과 연결될 때 아이, 남성, 가족에 반하는 존재로, ‘십 대 엄마’, ‘복지 의존자’, ‘성적으로 무책임한 자’라는 상과 연결될 때는 ‘부주의한 실패자’로, ‘이혼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 양육자’, ‘싱글맘’과 연결될 때는 핵가족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호명된다.”
“여성의 선택권, 자기결정권”
“이기적 선택으로 자행되는 살인”
“피치 못할 선택이자 필요악”
‘선택’의 함정에 빠진 임신중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급부상한 임신중지 운동은 임신중지와 관련한 법과 담론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등장한 세 관련 단체 RTL(Right to Life, 생명인권그룹), ALRA(Abortion Law Reform Association, 임신중지법개혁연합), WLM(Women’s Liberation Movement, 여성해방운동)은 저마다 임신중지라는 결정에서 ‘선택’이라는 수사를 활용했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모든 법률 폐기를 주장한 WLM은 임신중지권이 여성의 ‘선택권’이자 신체에 대한 ‘통제권’, 나아가 ‘자기결정권’임을 주장했다. RTL은 사람으로 형상화된 태아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며 임신중지가 여성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자행되는 ‘살인’이라 주장했다. ALRA는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동의하는 동시에 ‘선택’이라는 글자 앞에 ‘피치 못할’이라는 조건을 달아 임신중지를 ‘필요악’으로 보는 오늘날 보편적인 견해를 형성했다.
이렇게 임신중지 서사에 도입된 ‘선택’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임신중지 서사를 왜곡하고, 임신중지 여성을 괴롭혀 왔다. 200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임신중지와 관련된 여성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관련 법안 지지자들조차 여성이 모든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극단적’인 접근이라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율성을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임신중지 비범죄화와 의료화에 찬성하는 입법자들 역시 임신중지 결정에서 의사의 조언은 중요하고, 임신중지가 쉬운 일이어서도 안 되며, 당연히 자기 편의만을 위해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여성은 없고, 아주 난처한 상황이 아니라면 여성은 반드시 모성을 ‘선택’ 하리라는, 임신중지 반대자들과 정확히 같은 주장을 한다. 결국 ‘선택’이라는 수사는 임신중지라는 결정마저 태어날 아이의 복리를 위한 ‘모성적’ 행위로 못 박았다. 이는 70년대 만들어져 확고하게 유지되어 온 임신중지에 대한 인식이 지금까지도 얼마나 강력한 규범으로 작동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친임신중지권 진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준다.
반임신중지 세력 역시 “여성의 선택을 금하기는커녕 그 선택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편다. 2007년 설립된 반임신중지 단체 ‘진정한 선택Real Choices’은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단체를 자청한다. 이들은 그간 여성들이 내린 임신중지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 적절한 정보가 없었기에 사회로부터 ‘강요’받아 내린 잘못된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입법자와 행정가 들이 이런 논리에 매혹되는 것은 당연했다. 재생산권에 대한 통제라는 결실을 얻으면서도 임신중지 범죄화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이 아니라 여성을 ‘돕는다’는 이미지로 비춰지는 데는 이 같은 ‘모성적’ ‘프로초이스’의 논리만한 것이 없었다.
반임신중지 세력이 펴는 ‘친여성’ 정치는 벌써부터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7월, 미국 35개 주에서 임신중지 전 상담이 의무화됐다. 상담자는 임신중지 위험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필수적인 정보처럼 전달하고, 초음파 영상을 보며 배아/태아를 ‘잠재적 아이’로서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후회할 선택’을 내리기 쉬운, 국가, 의사 등에 의지해야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취약한 존재가 되고, 결국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낙인은 여성 전체의 인권을 훼손하고 탄압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와 임신중지권 보장을 주장하는 정치인과 입법자 들 역시 ‘합법적이고, 안전하고, 드문’ 임신중지를 목표로 삼아 왔다. 하지만 임신유지만을 정규화하는 반복적인 정치 논리는 임신중지를 ‘올바르게’ 결정할 권한을 위임받고, 실제 임신중지 시술을 맡는 의료인들에게도 낙인을 찍는다. 지향점이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드문’ 임신중지가 될 때, 의료인의 제일 과제는 임신중지를 ‘드물게’ 만드는 것, 임신중지를 막는 것이 된다. 실상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국가에서도 이런 낙인은 여성 건강 전문 의료인들의 수가 늘 부족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낙인은 연구자에게도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임신중지 트라우마만을 연구 주제로 삼도록 무언의 강요로 작용했다. 동시에 원치 않은 임신이 출산으로 이어질 경우 생기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낙인과 좌절이 불러 온 여파는 다시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극우세력의 반임신중지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된다.
“임신중지는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한 문제”
입법을 위한 입체적이고 실질적인 임신중지 논의는
금기와 침묵을 깨고,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위한 첫걸음인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끌어 내기까지 많은 논의와 노력이 있었고, 특히 임신중지 여성들이 화자가 되어 임신중지에 대한 경험을 나누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 있던, 드디어 말해진 임신중지 경험들은 임신중지가 여전히 범죄인 상황에서 임신중지라는 결정을 내린 여성이 제도적, 문화적으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것들이 다수였다.
한국에서 여성인권과 재생산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동안, 미국에서는 앨라배마주 상원에서 모든 임신중지를 중죄로 처벌하는 임신중지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1973년에 있었던 임신 후 28주(6개월)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 위한 보수 세력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응으로 트위터에서는 많은 여성이 #ShoutYourAbortion와 #YouKnowMe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했다. 배우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비지 필립스를 시작으로 레이디 가가, 밀라 요보비치 같은 유명인들을 포함해 여성 수천 명이 공유한 임신중지 경험 중 많은 수는 ‘구원받은 듯한’, ‘감사한’, ‘후회 없는’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이 역사적 교차점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하며, 어떤 청사진을 그릴 수 있을까.
에리카 밀러가 『임신중지』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확실하다.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근원은 실상 법이 아니다. “법은 젠더, 임신, 모성 규범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며 “규범은 법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이미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이룬 국가들에서 보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임신중지 범죄화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임신중지를 둘러싼 규범을 바꾸어 내지 못한다면 언제든 우리가 일군 결과는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판결 이전으로의 퇴보를 미연에 방지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임신중지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치’, ‘애통함’, ‘모성’으로 얼룩진 임신중지 규범을 바꾸는 일임을 일깨운다.
이 책의 원제에는 임신중지를 뜻하는 ‘abortion’ 앞에 ‘행복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우리는 과연 ‘행복한’ ‘임신중지’를 말할 수 있게 될까. 지난해 5월 한 해 먼저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이룬 아일랜드 수정헌법8조폐지연합 비서관 시네이드 케네디는 ‘행복한’ 임신중지가 급진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로지 임신중지의 권리가 공격받는 곳에서만 그 수식에서 과도한 급진성과 불편함을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이 ‘끔찍한’을 ‘행복한’으로 대체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모든 경험과 결정들이 그렇듯 임신중지 역시 기쁨 혹은 슬픔이나 정상이나 비정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임신중지』는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복원함으로써 사회와 법이 그 다양성을 포괄하도록 촉구한다.
한국에 이 책이 소개되는 지금, ‘낙태죄’라는 ‘죄목’을 법문에서 지워 내고, ‘임신중지’라는 말로 이 경험을 표현하는 데까지 우리는 와 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임신중지 앞에 여전히 따라 붙는 ‘수치스러운’, ‘후회되는’, ‘끔찍한’이라는 수사를 지워 내는 것이다. ‘행복한’을 비롯해 ‘구원받은 듯한’, ‘감사한’, ‘후회 없는’으로 말해지는 임신중지 경험을 주저하지 않고 나눌 토대를 만드는 데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실질적이고, 입체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감정적인 선택 7
1장 선택의 정치 51
2장 행복한 선택 87
3장 선택의 애통함 129
4장 수치스러운 선택 173
5장 국가의 선택 205
맺음말: 모성 바깥의 삶 239
감사의 말 259
옮긴의 말 263
미주 265
참고 문헌 315
찾아보기 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