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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제39권 제3호Vol.39, No.3

editorial

‘다시’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What is ‘the’ Welfare State?

“불안감보다도 더 해롭다고 판명된 유행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해야 한다. 사실 사회학자라는 우리의 소명은, 더 이상 낭만적일 수 없는 이 시대에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용기와 그에 대한 일관성 있는 태도, 그리고 인간적 가치에 대한 충성심이 심사되는 영역이 될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의 1972년 리즈대학 교수 취임연설 중)1)

실제로 사회과학자가 ‘유행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기란 쉽지 않다.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의 속성상 사회 현실에 천착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보건․복지 영역은 정치와 정책의 변화하는 맥락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모델링하고 설명하고 예측함에 있어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기란 더 어렵다. 복지국가의 수많은 제도에 내재된 가치들 간의 상충성과 갈등 관계를 연구자 개인의 분석틀 속에서 가르마 타고 묶어내면서 자신의 일관된 가치관을 견지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고 가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건․복지 연구자들이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 중 하나는 ‘국가란 무엇인가’ 나아가 ‘복지국가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아사 브릭스(Asa Briggs)는 복지국가를 적어도 세 가지 방향에서 시장의 힘을 수정하려는 노력에 국가를 동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과 가족이 그들 노동의 시장가치나 자산과 무관하게 최소 소득을 보장받는 것, 개인과 가족의 위기를 초래하는 사회적 위험들, 예컨대 질병, 노령, 실업 등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불안정을 줄여주는 것, 그리고 지위나 계급의 구분 없이 모든 시민들이 용인되는 범위 내에서 보편적으로 사회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국가가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이상적 복지국가라면 시민들은 생애주기 상, 혹은 불운으로 인해 부닥칠 수 있는 불행으로부터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적 복지국가에서 개인은 그의 귀속적 특성에 무관하게 삶에서 동등한 기회를 가지며, 최소한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과 안정을 누릴 수 있다.2) 복지국가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위험을 분산하고 재할당하는 장치이며, 그 전제는 질병, 노령 같은 사회적 위험은 계급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편재된 위험이라는 것이다.3) 따라서, 복지국가는 모든 사람이 기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공유하는 연대의 체현 방식이다. 다만 시간적, 계층적 이연성(defer)과 호혜성(reciprocity)이 존재할 뿐이다. 새삼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명확히 구분되는 소위 ‘두 국민 국가’(two nations)에서 복지국가의 이상은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복지국가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에 3.2%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 사회지출 수준은 2018년 11.1%로 증가했다.4) 그 사이 4대 사회보험은 개보험화되었고, 시혜적인 공공부조제도였던 생활보호제도는 권리성이 강화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로 거듭났으며, 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되었고, 보편적인 무상보육서비스가 실시되었다. 장애연금과 근로(자녀)장려세제가 도입되었고, 사회서비스도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2018년 아동수당이 도입됨으로써 한국 복지국가는 선진 복지국가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복지제도들을 두루 구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복지국가인가? 아니, 제도가 조금 더 성숙하기를 기다리면 복지국가를 기대할 수 있는가?

복지국가의 ‘안정’(security) 기능이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척도를 통해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생애주기 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면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위험은 노령이다. 한국의 66세 이상 퇴직연령 인구의 빈곤율은 2017년 중위 가처분소득 50%를 기준으로 43.8%로 여전히 OECD 회원국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5) 현재의 그리고 아마도 미래의 상당수 노인들은 노후 소득 불안정에 오롯이 노출되어 있다.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18.8명)보다 약 3배 더 높은 58.6명에 이른다.6) 노령과 함께 구(舊) 사회적 위험의 대표적인 요인이 질병이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들 중 상병보험 혹은 상병급여가 없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이인정은 “저소득 암생존자의 구직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돌아왔지만 황폐해진 일상의 삶’, ‘내몰리듯 나서야만 하는 구직시장’, ‘나서는 발걸음을 부여잡는 암의 상흔’, ‘상처투성이에 맨손으로 올라야 하는 가파른 구직의 절벽’, ‘흔들리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마주하기’, ‘발 디딜 곳 없는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구직이란 희망의 외줄 타기’라는 요소를 도출하고 있다. 질병에 대한 의학적 안전망으로서의 건강보험과 함께, 사회․경제적 안전망으로서 상병급여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결과이다. 2019년 한국 복지국가의 쓸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요소는 청년의 주거빈곤이다. 김비오의 논문 “청년가구의 주거빈곤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청년 가구 중 최저주거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주거비 과부담에 해당하는 주거빈곤 가구는 33.1%로 약 3가구 중 한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복지국가는 여전히 구(舊) 사회 위험과 신(新) 사회 위험에 모두 제한된 안전망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복지’라는 명사 앞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곤 했다. ‘생산적’, ‘참여’, ‘능동적’, ‘맞춤형’, ‘포용적’ 등이 그것이다. 정권 초기에 이러한 ‘명명’(命名)에 대해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들이 여지없이 반복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7) 바우만의 충고처럼 유행을 좇아 미사여구에 매달리기보다는 본질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인간적 가치와 좋은 사회를 꿈꾸는 복지국가의 이상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 법이다.

Notes

1)

Bauman, Zygmunt. (2015). 사회학의 쓸모: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화. (노명우 옮김). 파주: 서해문집. (원서출판 2013).

2)

Briggs, Asa. (1961). The Welfare 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 European Journal of Sociology, 2(2), pp.221-258; 여유진 등. (2015). 한국형 복지모형 구축: 생애주기별 소득․재산․소비 연계형 복지모형 구축. 세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p.337.

3)

여유진 등. (2018). 한국형 복지모형 구축: 복지국가의 역사적․철학적 기반 연구. 세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p.218.

4)

https://stats.oecd.org/에서 2019. 10. 1. 인출.

5)

https://stats.oecd.org/에서 2019. 10. 1. 인출.

6)

김은정. (2019. 6. 25). ‘외로움’에 스스로 목숨 끊는 노인들이 늘어난다. 청년의사.

7)

老子의 道德經, 上篇(道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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