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6-072X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 굳이 정의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인간성의 자명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들이 흔들리자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게 되었다.
이 거대한 질문에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앞선 학자들의 논의로부터 힌트를 얻어보자. 찰스 테일러(Taylor, C.)에게 인간은 욕구와 감정의 질적 가치를 평가하는 강한 평가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Taylor, 1985),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를 판단하는 도덕적 지평 안에서 방향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움이라고 보았다(Taylor, 1989). 아렌트(Arendt, H.)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복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를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으로 보았다(아렌트, 2017). 이들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인간다움의 전제로서 타인과의 ‘관계성’이다. 테일러가 제시한 강한 평가 능력과 도덕적 지평은 타자와의 관계와 대화 속에서,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언어와 전통 속에서 구성되며 아렌트의 행위 개념 역시 타자의 존재와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불행히도 근대 산업사회를 관통하며 인간다움의 중요한 속성인 관계성은 물질적 번영의 대가로 지불되었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가 정점에 달한 오늘날, 그 대가로 지불했던 관계의 상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잔인한 역풍을 맞고 있다. 가족과 지역사회가 소화하던 돌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회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지만 간병살인이 보여주듯, 돌봄욕구는 적절하게 충족되지 못하고 인간의 존엄은 훼손되고 있다.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서사 속에 스스로를 책임지도록 던져진 개인들은 자립의 성취가 아닌 연대 없는 고립의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수는 3,924명에 달했으며(보건복지부, 2025) 사회적 고립도는 33%로 조사되었다 (국가데이터처, 2026). 지난 1년간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 비율은 73.6%로 국민의 2/3는 정신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2024),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흔드는 치명적인 징후들이 분출되자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 연대와 신뢰의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 복지사회를 향한 다음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공동체적 관계 회복은 정책의 중심부 의제로 자리 잡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환원했으며 관계 회복은 공적 의제가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사적 과제로 밀려났기 때문이다(Brown, 2015). 무엇보다 관계 회복의 정책은 근대 복지국가 정책·행정 패러다임과 본질적으로 충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정책은 투입·산출·성과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관계는 측정 불가능하고 표준화할 수 없으며 정책 추진의 시간 경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일반적인 정책은 개인에게 급여와 서비스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지만, 관계는 전달될 수 없다. 관계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는 것이며, 조건을 조성할 수 있을 뿐 인위적으로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공동체성과 관계성을 불편한 정책의제로 만들어 왔으며, 바로 이 불편함이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다.
지금까지 사회적 경제 육성, 마을만들기 등 공동체적 관계 회복을 위한 정책적 시도는 지속되어 왔지만 파급력이 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5월 개최된 2026년 제1차 고독사 예방 협의회에서 정부는 기존의 고독사 방지 중심 정책을 ‘사회적 고립 예방정책’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발표에는 복지부 제1차관을 사회적 고립 전담차관으로 지정하고 범정부 5개년 기본계획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보건복지부, 2026. 5. 13. 보도자료). 관계성 회복의 이슈를 정책의 중심 의제로 제기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한 점은 유의미하지만 ‘범정부 콘트롤타워’, ‘기본계획 수립’ 등 익숙한 프레임으로 시대적 난제에 실효성 있게 대응할 수 있을지 석연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적 관계 회복의 정책 패러다임이 어떠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지양해야 하는 원칙을 짚어보며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우선, 사업의 표준화와 매뉴얼화를 지양해야 한다. 표준화는 복지 서비스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담당자 개인의 역량 차이를 최소화하며,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관계를 다룰 때 표준화가 오히려 불신과 고립의 심화를 초래할 수 있음은 서비스 현장에서 종종 목도되었다. 가령, 심한 자해 충동을 느낀 시민이 자신을 붙잡아 줄 누군가와의 대화가 절박한 순간 콜센터에 전화했는데, 위험 신호를 감지한 상담사가 매뉴얼에 따라 경찰에 신고를 해 경찰이 출동했다면, 시민의 자해는 막을 수 있었겠지만 향후 유사한 상황에 더 이상 콜센터를 찾지 않게 될 수 있다. 표준화된 프로토콜은 위험의 관리에는 효과적이지만 진정한 연결을 막음으로써 불신과 고립의 심화라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책임자 처벌주의를 지양하고 재량권을 확대해야 한다. 앞선 예시에서 상담사가 매뉴얼에 따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요즘 만연한 책임자 처벌주의가 전문적 재량권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지서비스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소재를 찾아내 처벌하는 엄벌주의가 만연해 있다. 이는 권리의식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변화와도 맞닿아 있지만, 동시에 공공서비스에 대한 과잉 불신과 낮은 사회자본, 복잡한 사회구조적 맥락 해석의 난해함과 개인 과실 환원주의의 편리함, 디지털 미디어의 사건 공론화 기능 강화 등과 뒤섞이며 증폭되고 있다. 특히 SNS와 실시간 뉴스는 복잡한 구조적 맥락을 제거한 채 대중이 분노할 수 있는 '확실한 빌런'을 지목하는데, 대중에게는 복잡한 법 개정이나 예산 확충보다 책임자를 징계하고 파면하는 것이 가장 직관적인 '정의의 실현'으로 소비되고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은 완전히 통제될 수 없으며 특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인간의 삶'을 다루는 복지 서비스 현장에서 책임자 처벌주의의 부작용은 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책임에 대한 공포는 방어적 실천을 초래하며 이는 고위험 대상자의 회피, 사각지대의 확대, 서비스의 형식화로 이어진다.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관계적 복지로 가기 위해서는, 현장의 전문가들이 책임이나 처벌의 공포 없이 서비스 대상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 규정된 절차를 벗어났더라도 선의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행위라면 면책하고 보호해야 한다. 현행 공무원 중심의 '적극행정 면책제도'를 민간위탁기관을 포함한 복지 영역에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특히 고립, 돌봄 등 매뉴얼화하기 어렵고 능동적 서비스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의도와 과정이 정당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면책하는 신뢰의 원칙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용자의 자립과 향상, 사회참여, 관계 회복은 무위험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요양기관 노인의 산책과 운동, 장애인의 지역사회 활동, 독거노인의 외출, 은둔청년의 모임 참여는 모두 일정한 위험을 동반한다. 이러한 위험은 회피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이용자와 함께 이해하고 조정해야 할 ‘좋은 위험’ 또는 ‘관계적 위험’이다.
마지막으로 성과주의, 평가주의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신공공관리론 이후, 복지 정책과 서비스는 파워(Power, 1997)가 말한 '감사 사회(audit society)'의 논리, 즉 측정과 평가의 체계로 재편되어 왔다. 감사와 성과관리는 투명성을 높이는 장점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좋은 판단, 진정성 있는 서비스, 신뢰 형성보다 증빙 가능한 절차를 남기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역효과를 낳는다. 성과관리는 사업의 경계를 정하고, 산출물을 명시하며, 예산을 집행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종료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관계와 공동체는 이런 논리와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신뢰는 성과평가 단위인 1년 안에 형성되지 않으며, 공동체적 유대는 행사 횟수나 참여 인원으로 환산될 수 없다. 성과관리가 정책과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기보다 오히려 질곡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준거가 되는 지표가 필요한데, 지표의 존재는 정책과 서비스의 질을 속박하게 되어 역설적으로 질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이라고 불리는 이런 현상은 특히 관계적 복지 정책에서 뚜렷하게 작동한다. 관계의 깊이를 프로그램 참여 인원으로, 공동체 복원력을 행사 개최 횟수로 환산하는 순간 정책은 수치를 관리하는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관계 회복의 정책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단기 성과 없이도 가능하게 하는 장기적 재정 구조와, 과정 자체를 목적으로 인정하는 행정 문화로의 전환을 요구한다(Sennett, 2012). 또한 수치화된 지표 대신 내러티브, 참여적 평가, 신뢰 기반의 관계를 공적 자원 배분의 근거로 허용하는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결국 복지의 다음 과제는 더 많은 서비스를 더 빠르게 전달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다움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파괴된 시대에, 복지는 인간이 인간답고, 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관계는 설계할 수 없고 성과로 제출할 수도 없지만, 인간이 행복하고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기반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복지국가는 고립된 개인을 관리하는 국가가 아니라, 실패와 위험 속에서도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는 국가여야 한다. 표준화와 책임, 성과의 언어를 넘어 신뢰와 재량, 돌봄과 연대를 위한 시공간을 회복할 때, 복지는 비로소 인간다움을 지키는 제도가 될 수 있다.
2026. 6. 30.
『보건사회연구』 편집위원회 편집위원 이소정 (남서울대학교 휴먼케어학과 교수)
국가데이터처. (2026). 국민 삶의 질 지표: 사회적 고립도. 지표누리. https://www.index.go.kr/unity/potal/indicator/IndexInfo.do?clasCd=8&idxCd=8080.
보건복지부. (2026. 5. 13.). 사회적 고립, 개인 문제가 아닌 범정부 예방 과제로 관리한다. 보도자료. https://www.mohw.go.kr/board.es?act=view&bid=0027&list_no=1490499&mid=a10503010100&nPage=1&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