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6-072X
의료개혁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의료 현장의 고통과 의대 교육의 교착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2024년 2월에 ‘의사인력 확대 방안’을 발표한 이후 정부와 의료계가 대치하면서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이 이어졌고 아직까지 합의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표적인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와 정부 사이의 갈등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현재 한국에서 마주하고 있는 극단적인 대립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정부가 추진하던 의료개혁이 ‘의료대란’으로 전개된 이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직면한 의료개혁의 과제는 국내 의료제도의 역사적 과정에서 오랜 기간 존속된 구조적 제약과 연관된 문제이다.
현시점에서 보면 현대적인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체계적인 의대 교육을 통한 인력양성, 병원 중심의 진료, 의료보장제도라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나라마다 이 세 가지 영역이 형성되어온 시점과 순서가 다르며 그 양상도 다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공적 의료보장의 원리가 발전하는 과정과 현대적인 교육체계 혹은 병원 중심의 진료체계가 확립되는 과정이 중첩되거나 의료 보장제도가 먼저 도입되면서 공공 부문의 역할이 중심에 있게 되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전문가집단으로서 의료계의 성장이 먼저 이루어진 후 부분적으로 공적 의료보장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공공 부문의 제한적 역할뿐만 아니라 의료 영역에 부여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맥락이 다르게 형성되었다.
한국은 미국과 유사한 인력양성체계와 병원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의료계의 성장이 먼저 진행되고 이후 공적 의료보험이 도입된 순서를 가지고 있다. 제도의 도입과정은 미국과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12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확립된 점과 의료공급에 있어서 지역단위 규제가 미흡하여 거의 자유방임에 가까운 민간 우위의 의료공급체계라는 점, 병상 수와 고가 의료 장비의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점 등 미국과 다른 면도 많다. 이 글은 국내 의료제도 기반 형성기와 이후의 제도 도입과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유산을 파악하고, 현재의 의료개혁의 지체가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며 어떤 구조적 제약과 연관되어 있는지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해방 후 미국의 영향 아래 형성된 국내 의료제도 초기의 특징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며, 전문가로서의 높은 자율성과 강한 집단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의료계의 특성상 그들의 인식과 문화가 계승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다른 영역보다 경로의존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의료제도 기반 형성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적부문의 제한적 역할이다. 해방 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의사들이 연수교육 등1)을 통해 수용하게 된 미국의 의료체계는 정부의 역할을 위생과 방역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진료 부문은 민간 영역 중심으로 설정하였으며, 이는 초기 의료인들이 민간 의료공급체계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1965년 전까지 공적 의료보장체계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의료제도 초기의 핵심적인 의료집단은 공적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부재한 가운데 민간 중심의 체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둘째, 전문의 중심의 인력양성체계이다. 의료제도 형성기에 장기간의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식 인력양성체계를 받아들이면서 국내 의료체계는 초기부터 전문의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인력양성체계는 선진 의료시스템을 수용한 것이기는 하나, 장기간 수련이 필요한 전문의 중심 체계는 높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를 형성하였고 의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950년대의 사회적 필요에 잘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전문의 중심의 인력양성 시스템이 자리 잡은 이후인 1977년 공적 의료보험이 도입되면서 의료계가 원했던 행위보상방식(fee-for-service, FFS)은 의료계의 자율성을 발휘하는 데 유리한 반면, 의료수가를 둘러싸고 정부와 의료계가 지속적으로 갈등하게 되는 지불제도이다.
1960년대부터 의과대학과 의료기관 증설이 이루어지면서 민간 중심의 의료공급체계가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1977년 공적 의료보험이 도입되었고, 1989년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은 의료공급의 확대와 공적 의료보험의 확대와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의 확대가 중첩되면서 의료시장이 확대된 시기이며, 이는 성장 지향적이고 수익 추구적인 의료제도의 특징을 구축하게 되었다. 경제성장과 의료보험 제도의 영향으로 국내 의료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990년대까지도 의료공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의료기관과 의료인력의 증가에 따른 공급자 간의 경쟁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2000년 단일 건강 보험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도 2005년부터 전개된 보장성강화정책과 2008년 이후 급증한 실손의료보험이 수요를 확장시키면서 성장의 관성은 지속되었다. 그 결과, 2000년 이후 국민의료비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2022년 GDP 대비 국민의료비는 9.7%로 OECD 평균(9.2%)를 상회하였다.
이와 같은 의료시장의 확대하에서 의료공급도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지역 간 그리고 진료과목 간 의료 자원의 불균형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특정 진료과목으로의 쏠림으로 인한 응급, 외과, 소아과 등 진료 과목의 공백이 초래한 사회적 부작용은 자유방임적이고 수익추구적인 의료체계에 제동을 걸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는 효과적이지 않은 의료수가 관리와 의료계의 높은 자율성이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혁의 과제는 국내 의료제도의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현재 한국에서 마주하고 있는 의료자원 공급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의료공급의 지속적인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 간 의료자원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에 기여하는 제도적 요인은 지역단위 의료공급의 규제의 부재이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지역별 병상 수 상한제 폐지, 병상 신증설과 관련하여 보건복지부 장관 사전 승인에서 시도지사가 허가 하도록 규제 완화, 1994년 대학병원 신증설 처리 기준 폐지 등 일련의 규제완화 조치로 수도권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의료기관의 대형화가 이루어지면서 의료인력 배분의 불균형을 심화시켰고, 병원의 수도권 이외 지역의 공급 부족과 더불어 수도권의 경쟁 심화라는 다중적인 문제를 양산한다. 따라서 30년간 유지되어온 자유방임에 가까운 공급 확대와 규제 완화의 방향성을 전환하지 않으면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로 의료 공급의 확대 양상을 보면서 의료인력 배출에 비해 늘어나는 병상 수가 훨씬 많아 심한 불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반면, 병상 수는 OECD 평균의 3배에 달하고 있다.2) 이러한 결과로 초래되는 의료기관의 인력 부족과 경쟁의 심화도 문제이지만, 과도한 병상 수의 증가는 비용을 증가시키므로 원가를 보상받기 위한 의료수가 인상에 대한 요구의 증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아울러 고가의 검사 장비 유치와 수익 추구적 의료기관의 관행이 결합되 어 인력 확충보다는 시설과 장비에 의존한 진료에 치중하여 의료서비스의 비용 증가에 비해 질 향상은 확보되지 못하는 불균형을 초래한다. 이는 고가 장비 중심의 진료 행태의 왜곡과 함께 특정 진료과목으로의 쏠림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이다.
셋째, 미흡한 의료서비스의 가격관리이다. 의료보험 제도 도입기에 의료계는 의료수가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였으며, 이후 단행된 여러 차례의 높은 수가 인상에도 불구하고3) 이러한 불만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건강보험 제도는 민간 우위의 공급체계하에서 서비스 공급을 사실상 민간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시행되고 있어 의료계는 높은 협상력을 가질 수 있으며, 비급여 서비스에 대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어 이중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다. 즉, 급여 항목별로 수가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의료계는 보험수가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협상력을 발휘하는 한편, 실질적인 규제가 없는 비급여서비스에 대해서는 가격과 공급량에 대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급여 영역에 대한 협상력의 확보와 비급여에 대한 자율성의 혼재는 수익 추구 지향성을 높일 수 있다. 이는 수익에 유리한 진료과목에 대한 선호와 결부되어 의료비 지출과 진료과목 간의 인력배분의 합리성을 저해할 수 있다. 비급여와 미용 시술 등으로 수익을 확장하는 진료과목들의 수익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필수의료과목과의 격차는 줄일 수 없으며 이는 인력 배분 문제의 지속 또는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역사적 맥락에서 확인되는 구조적 제약과 더불어 의료계가 정부와의 갈등 국면에서 이익의 관철 또는 개혁의 저지를 성취한 경험은 의료개혁을 지체시키는 요인으로 보인다.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료계의 대정부 투쟁의 강도가 크게 높아졌고 전국 단위의 결집이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부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다. 이러한 정책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이번 의료개혁 진행과정에서 최장기간 동안 강도 높은 저항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는 이전의 의료개혁의 실패 또는 지체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면밀하게 고려해야 하고, 개혁의 추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사회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의대 증원과 같이 사회적 지지가 높은 이슈조차 개혁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은 전략의 부재와 조정 능력의 결핍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의료개혁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은 정부의 정책 역량과 전략의 부족과 함께 의료계의 무책임성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지체는 시민들의 삶의 위기와 직결되어 있으며, 의료 영역에서 자유 경쟁의 파괴적 성격을 문화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025. 3. 31.
『보건사회연구』 편집위원회 위원 허순임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미군정기 초기인 1945년 11월부터 한국 의사들에 대한 연수교육, 미네소타프로젝트와 차이나메디칼보드 등 의료인력양성과 병원 경영을 위한 지원프로그램, 한국전쟁 시기 동안 군의관을 통한 직접적인 교육과 훈련, 의약품과 의료기기에 대한 원조 등 미국의 지원은 장기간 여러 측면으로 제공되었다.